영화일기/cinejournal

2010.9.13

Lemarcel 2010. 9. 14. 10:24
왕십리 cgv 8관
2010.9.13.월. 20시

(옥희의 영화는 2010년 9월16일 개봉이랍니다. 아래글은 제작사에서 소개한 줄거리 이상은 커녕, 거의 영화의 내용을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만의 옥희의 영화를 볼테다라는 분은 건너뛰심이 좋을듯.)

옥희의 영화
홍상수 연출, 한국, 청소년관람불가, 80분, 2010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를 처음 보다. 홍상수 감독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도 그러해야 할 듯 한데, 그의 영화를 보고 나서 나중에 다시 한번 보고 그 생각을 정리하겠다는 말은 좀 이상한 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를 매번 '같이 반복'해서 본다는 말은 좀 이상하기 때문이다. 거기엔 겹쳐지고 끊어지고 멈춰버리고 점핑해버리는 식의 일종의 균열이 있는 거 같다. 그 균열은 알게 모르게 거기에 있어왔다는 식으로 가정하게 될 때, 그의 영화를 단지 반복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그 균열 아래로 추락한 다음 언제 어디로 다시 그 출발점으로 돌아올지 호언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보고 있는 이러한 이야기를 다음번에 다시 볼 때, 그러한 이야기로 그곳에 도착하기는 쉽지 않다. 어느순간 어떤 균열에 의해서 그러한 경로가 파괴되거나 그 곳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르는 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있는 홍상수의 영화들은 그러하다. 그런데, 이 균열은 피할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경험적으로 혹은 겪어본 바로 그렇다.) 매번 그 균열들의 종류와 그때 그때 마다 달라지는 경로들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감상문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자기 기록이 필요하다.
 이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는 더욱 그러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옥희가 누구인지 알수 없다. 그것도 옥희의 영화인데, 그 옥희의 영화란 게 내가 본 그것이 맞는지 혹 보긴 한건지 좀 미심쩍다. 이를테면 이번 영화의 첫번째 감상에서 내가 만난 균열은 네가지 인데, 그 첫번째, 보이스 오버/나레이션, 각각의 네가의 에피소드마다 나오는 하나의 인물의 화면 바깥의/화면내의 목소리들이었다.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는 일종의 '시네마 드 파롤'이다. 옥희의 마지막 말은 이 영화가 만들어지긴 한건지 혹은 만들어지고 있다는 건지. 이렇게 만들것이라는 건지 문득 옥희의 영화가 뭔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언지 알수 없게 된 지경에 가까웠던 것 같다.(이같은 생각을 했다는 거지. 굳이 여기서 그 옥희의 대사가 무언지 적지는 않겠다.) 두번째, 에필로그 같은 프롤로그, 네가지 에피소드로 이뤄지는 옥희의영화. 그중 첫번째 에피소드가 첫번째에 위치한다라는 사실은 좀 신기하다. 이 말은 그것이 그렇게 위치를 점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시간 순서가 내게 강요한 어떤 독해의 과정이 있는데, 그 과정이 매우 신비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아직 개봉도 안한 영화에 대해서, 그 시간순이 어쩌고 하는 말들을 떠벌리는 건 피해야 겠지.) 세번째, 역할 바꾸기 다른 이전 작품도 그러하지만 그의 역할 바꾸기는 어린 아이들의 놀이처럼이라기 보다는 은밀하고 마치 인물들이 스스로 착각한 듯 애매하게 진행된다. 네번째, 죽음은 어디에 있는가? 알 수 없다. 아무도 땡깡을 부리지 않는다. 그대신 술을 마시고 고백하거나 애걸하는 정도이다. 다만 가장 극단적으로 보이는 인물은 옥희인 듯하다. 그러한 것을 영화로 찍었기 때문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이별과 다른 누군가의 불륜이라는 것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