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름별 목록/임권택 IM Kwon Taek

임권택_1962년_두만강아 잘있거라_

Lemarcel 2008. 7. 7. 08:26
두만강아 잘있거라
임권택
1962
98분
한흥영화사
한국
흑백
Mo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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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보관된 프린트
몇몇 장면에서는 사운드와 이미지가 훼손된 상태.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8년7월6일 일요일 맑음

11시 무렵

한국 영상자료원

영상자료실 본원

멀티미디어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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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아 잘있거라.영화가 시작하면, 연화는 그의 동생 현구와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마치 연인처럼 보이기까지하는 두 남녀는 다정한 오누이간의 이별하는 중이다. 그때, 매형이 나타나고 현구는 몸을 조심스레 몸을 숨기며 재빨리 등돌려 그 자리를 떠나간다.  다음 신에서 영우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어머니가 준비해놓은 마지막 밥상을 두고 어머니와 작별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그들은 학생독립단을 조직해 서대문 형무소를 파괴하였다. 오늘밤 경찰의 추격을 피해 경성(사울)을 만주로 떠나 독립단에 합류하려고 한다. 그 마지막 순간 영우는 어머니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한 어머니의 말씀뒤에 그때서야 영우는 오늘 밤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영우에게 그동안 숨겨왔던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말씀하신다. 그의 아버지 역시 독립단 활동을 하다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처음 들은 영우는 묻는다. 왜 그동안 자신에게 그 사실을 감춰왔습니까? 어머니는 대답한다. 내 눈에는 너는 언제나 어려보인단다. 어머니는 이미 이날을 위해서 흰 쌀밥을 준비해놓으셨다. 영우 앞에 놓인 밥상을 두고 자신 앞에서 맛있게 먹으라 말씀하신다. 영우 숟가락이 입에 닿기 전에 밖에서 호각소리와 고함소리가 난다. 영우는 숟가락을 입가에 가져갔다가 그대로 내려놓으며 자리를 일어선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죽지말고 꼭 살아돌아오라. 두가지 이별의 장면 이후에, 영화는 비로소 시작한다. 그리고 임권택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 영화의 오프닝은 이전에 알고 있었던 임권택의 어떤 영화들의 일종의 얼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설정은 거듭된 오해와 또 화해 그리고 운명적 조우를 통해서 앞을 알수없는 어떤 인물들의 운명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들은 기어이 만주로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등뒤에는 일본군들의 추격이 그들의 앞에는 그 알 수없는 사람들과의 근심스런 시간들이 남겨져 있다. 그들은 만주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곳은 탈출구나 도피처가 아니다. 사실은 그들은 독립군 연대를 구성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간다는 것은 가족을 등질수 밖에 없는 시간을, 고향땅을 떠나야 하는 순간을, 낯선 그 어딘가에서 누군지 모를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하나의 로드무비가 될수도 있을 이 영화를 임권택은 역시나 플래쉬-백으로 기억의 시간으로 연결한다. 그리고 낯선사람들의 조우 보다는 운명적으로 멀리 떨어져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들과의 관계에 더욱 집요하게 매달린다. 그리고 전투장면과 추격장면 혹은 도피장면을 통해서 그들의 해후와 또 다른 헤어짐들을 반복하고 있다. 임권택은 처음부터 그 반복되는 헤어짐과 해후 사이에 기억 혹은 역사를 통해 살아남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그렇게 훌륭한 대가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단지 서편제를 떠올리며, 그 기억속의 목소리와 사람들을 그리는 어떤 시간들로도 무언가 충분하지 않다라고 생각한 당신이라면, 기어이 이전의 임권택의 이 작품을 다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감히 다른 작품들, 이를테면 태백산맥과 서편제 그리고 하류인생과 천년학을 때때로 하나의 작품처럼 볼 수 있는 어떤 시간들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것이 그런것들을 그려내고 있음을 확인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임권택의 영화가 그렇듯이 (이를테면 이 작품에 대한 1962년 2월 신문기사를 찾아보면,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어떤 실제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만들었다는 문장들을 공공연히 확인할수 있다. 하지만, 그 소개글에서도 "삼일운동이 일어난지 얼마되지 않는 1920년대"라는 식이다. ) 이 작품에서도  그날들이, 그 시간이 언제인지 영화는 분명하게 말할 줄 모른다. 왜 그럴까? 혹시 그것은 이 영화의 발화의 양식일까? 아니면 이 영화가 만들어낸 사유의 방법일까? 혹시 이것은 잘못 만들어진 질문이거나 애초부터 없는 질문 아닌가??(lemarcel)

***
그리고 덧붙여서, 이제서야 임권택은 아버지의 영화를 말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혹은 그의 영화를 두고 아버지의 자리라고 말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는 어떤 아버지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저 실패한 아버지와 그의 기어이 살아남은 그 자식의 모습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들이 흉내내고 있었던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