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일기/cinejournal

L'Homme de Londres(2003-2007) de Bela Tarr et Agnes Hranitzky

Lemarcel 2008. 10. 20. 08:55
L'Homme de Londres
The Man from London
런던에 온 사람
벨라 타르 Bela Tarr, 아네스 라니츠키 Agnes Hranitzky
2시간12분
프랑스, 독일, 헝가리, 영국
2008년10월18일토요일
17시40
Reflet Medicis
제2상영관



이 영화를 다시 보기 위해서 Reflet Medicis로 갔다.이번주에는 단지 하루에 한번만을 상영하고 있다. 17시40분. 얼마전 나는 내 생애 마지막 영화를 생각하면서, 문득 이 영화를 떠올렸다. 좀 웃기는 얘기지만, 이 영화를 어제 안보면, 다시는 못볼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걸작들이 있지만. 이 영화는 이제 막 지난 10월 13일에 처음 보았을 뿐이다. 지난 9월24일에 개봉해서, 지금까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 이 영화를 아껴두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다. 이 주전부터인가? 부터 벨라따르의 영화의 많은 작품들을  프로그램으로 선정한 극장이 파리에 하나 있었다. 너무나 가보고 싶었지만, 그곳에 가면, 당장에 생활고에 시달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최근에 불고 있는 환율의 여파뿐만 아니라. 거의 세계적 경제공황의 직면에 있는 상황에서, 그 몇만원은 다른 여느때와는 좀 다른 가치이다. 따라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참아야 했다. 나역시 당장의 영화는 커녕, 잘못하다가는 몇년간의 영화를 못볼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 영화들을. 특히 두차례로 나눠서, 사탄탱고Satantago를 상영한다는 소식은 정말 놀랄 일이었다. 파리에서 사탄탱고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흔한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최근 불고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상영시간의 영화들의 집중 상영들이 눈에 띈다. 아마도 점점 그와 같은 영화들이 어제는 극장에서 불가능한 상영목록에서 오늘에는 특별한 상영목록으로 바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여튼 그 영화마저 볼 수 없었을 때, 나는 거의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은 그의 다른 영화인 런던에서 온 남자L'Homme de Londres (2003-2007)이다. 이 영화는 너무나 벨라타르Bela Tarr가 보고 싶을 때 보리라. 라는 식으로 점찍어 둔 작품이었다. 그리고 다른 중요한 영화를 겹치지 않게 감상목록을 만들어놓고 있다가, 드디어 기다리던 시간을 맞이 했다. 지난번 포스팅에서 언급했다시피. 그 영화는 충분히 내가 그를 기다릴 만 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탄탱고 만큼 거대한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곳에는 그의 다른 흑백 영화와는 다른 기묘한 매력들이 숨어 있다. 하지만,이런 저런 잡설들은 다 필요없다. 그것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번 벨라타르의 영화에 대한 헌사는 이런저런 그럴듯하게 포장된 이야기보다는 그냥, 왜 다시 그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은지에 대해서 써보고 싶다. 왜 나는 다시 그 영화를 보길 원하는가? 왜. 난 그러는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 영화를 다시는 못볼 것 같은 두려움에 떨게 하는가? 그리하여, 극장으로 이끄는가? 그렇다 지난번 첫번째 감상이후에 두번째 감상을 서두르게 만들었던 이유는 지난 번 포스팅에 쓰여져 있듯, 그 기묘한 움직임과 그 어떤 시간들이었다. 그 속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담겨져있는 듯했다. 결국 나는 이번 두번째 감상에서 그것을 충분히 살펴볼수 있었고 매우 신기했다. 하지만, 두번째를 보고 나서, 세번째감상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에 대해서 간단히 혹은 막 적어보자.

첫번째, 오프닝에서 크레딧이 시작하는  아네스 라니츠키
와 벨라타르 이름순으로 감독했다라는 자막이 나타난다. 그런데, 마지막에 보면, 벨라타르는 연출, 아네스 라니츠키는 공동연출과 편집을 담당했다고 쓰여져 있다. 참 재밌는 오프닝이다. 웬지 마지막 크레딧을 보면, 일관성이 없다라는 생각이 좀 들듯한데, 사실 어느 것이라고 해도, 틀린 표식은 아니었다. 다만, 오프닝에 나오는 그 타이틀은 벨라타르의 영화라기 보다는 일종의 공동작품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엔딩 크레딧은 매우 분명하게 그의 이름이 가장 먼저 쓰여져 있는데, 그것에서 어떤 심술같은 것을 느낀다. 그래 결국 이것도 벨라타르야. 혹은 왜 여긴 이런식으로 쓰여진거지? 라는 오묘하고 시덥지 않는 질문. 그것을 볼 때, 느낌은 좀 우숩다. 왜냐하면, 실제로,영화 소개에는 공동감독이라는 소개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레딧은 매우 뚜렷하게 쓰여져 있다. 그러나 반대로, 포스터에도 벨라타르 이름만이 분명히 보일뿐이다. 웬지 괴팍한 이유가 있을 듯하다.이 이유를 영화 안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것이 첫번째 이유이다. 다시 보면서, 벨라타르의 다른 영화와 이 영화의 차이점이 발견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그건 무얼까?

두번째 오프닝 크레딧이 지나고 나면, 첫번째 화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 장면은 매우 기이하다. 이 첫장면은 어느 여객선의 뱃머리를 보여준다. 그리고 수면위의 모습에서 부터 그 배갑판에 이르는 곳까지 카메라는 서서히 올라간다. 첫 화면부터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면서 보았는데, 적어도 5분이상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쇼트는 뱃머리위에 갑판에서 시작해서, 브라운이 호텔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다보고 있는 말루왕의 모습까지이다. 이 쇼트는 역시 대략 15분 정도이거나 그 이상인것 같다. 여기서 내가 다시 보고 싶은 첫번째 이유, 이 첫번째쇼트와 두번째 쇼트 사이에는 어떤 구분이 있었을까? 사실 영화를 보면서는 난 그것이 지금 설명한 것처럼 두개의 쇼트로 보았고 그 극장 안에서 알고 있던 밤과 새벽의 쇼트의 갯수는 단 네개의 쇼트였었다. 그런데 좀 웃기는 일이 일어났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새벽의 네개의 장면은 굳이 네개의 화면일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그의 영화, 첫장면은 매우 이상하다.  그 화면은 어떻게 보면, 말루왕의 시선과는 상관없어보인다. 그리고 다른 한편, 그 화면이 하나로 연결되었더라면, 무엇일까? 라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 여하튼, 질문은 바로 그것이 첫번째 쇼트가 뱃머리 위쪽을 보여주고 있을때즈음, 화면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배위를 지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카메라가 위치하고 있는 방향으로 보다 크게 그늘을 만들어놓으면서 그 아래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순간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그 크기와 위치는 변한다. 흑백화면으로, 특히 한밤중의 그늘이란 무얼까? 그것은 암흑이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다. 이 이 장면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면, 어쩌면, 두번째 쇼트라고 생각했던 그 분별 포인트는 그림자의 진한 암흑 효과일수도 있다. (말그대로 그 순간 검은영화가 되며 그리고 범죄가 시작된다.)그러니까. 사실은 하나의 쇼트가 두 개로 나눠보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 그 느린 화면에서 그 쇼트의 분절은 거의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분절을 잘 살펴보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분절 포인트, 특히 분절화라는 혹은 Articulation 은 그다지 효력을 갖고 있지 않다라는 게 영화관에서의 나의 태도였다. 우리는 때때로 쇼트하나와 다른 하나가 이어질때, 그것을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그것을 궁금해하다니. 하지만, 그것은 극장에서의 나를 다른 태도에 임하게 하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첫번째와 두번째의 쇼트의 경계를 그냥 잃어버리거나 아주 의도적으로 이영화는 내게 그것을 건너뛰게 만든 것이다. 어떤 영화들처럼, 그런데 문득 엄청난 긴 쇼트들을 보면서 굳이 이런것들을 왜 나눠야 할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다시 한번 그 순간을 확인해보고 싶다. 그것이 설사 두 쇼트일지라도, 이러한 분절화에 대한 문제는 유독 두드러 지는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그것은 그의 방문의 창문을 열고 창밖의 브라운을 바라보는 장면이나 상점에서 값비싼 물건의 값을 지불하고 나서 보이는 창밖의 풍경으로 이어질때, 그리고 그 긴골목에서 말루왕이 길을 걷다가 딸을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고 다시 공을 차고 있는 아이를 지나쳐 지나가고 그 뒤를 브라운이 따른 장면이 나오고 그리고 나서 카메라가 느닷없이 하늘을 볼때 그런 이상한 하나의 세계는 어떤 분절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수많은 분절의 원칙들을 아니 규범들을 기묘하게 굴절시킨다. 도대체 그 첫번째와 두번째 쇼트은 어디에 있는가?

세번째, 이 영화의 흑과백의 대조. 좀 웃기는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극장에서 사람들은 종종 잔다. 그렇다. 나도 잔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어느 순간 눈을 감고 영화를 보았다. 그 이유는 졸려서가 아니라. 너무나 눈이 부셔서 였다. 한마디로 빛들이 나의 시신경을 자극했다. 순식간에 피곤해진다. 그 어둠침침한 극장이라는 공간에서는 더욱.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연처럼 주어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눈을 자극하는 그 빛들은 무얼까? 말루왕이 일을하고 가방을 가져다놓고 결국 그것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배제된채 진행되는 밤과 새벽의 네 쇼트 (혹은 세쇼트). 그 다음 날 아침 혹은 낮.  길게 블라슬리로 걸어들어가는 그의 모습이 담긴 다섯번째 쇼트와 그가 브라슬리에 들러서 체스를 두는 여섯번째 쇼트가 지나가고 다시 골목길을 지나고 나서, 일곱번째 쇼트, 브라운이 그를 따르고 나서 갑자기 카메라가 하늘을 볼때, 거기엔 무엇이 있는가? 거기엔 하늘이 아니라. 뿌연 혹은 희끄무레한 빛의 과잉이 담겨져 있다. 왜인지 그 장면에서 눈이 부셨다. 그 낡은 건물과 그 낡은 옷의 사람들 너머에 내려쬐고 있을 태양이 거기에 있었다. 혹은 그 빛의 흔적이 고스란히 필름에 담겨져 있었다. 그 빛을 보는 순간. 눈을 뜰수없을 어떤 아찔함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말루왕이 집에가서 식탁에 있다 세면대에가서 씼고 방에 들어가서 하는 일은 창문을 여는 일이다. 그때 그 빛은 아까 보았던 그 빛보다 더욱 짜릿하다. 혹은 눈을 뜰수 없을 만큼 황홀하다. 히지만, 그 여덞번째 쇼트은 부인이 그 방에 들어와 창밖의 창문 가리개로 문을 닫아 버린다. 빛은 거의 사라지고, 그의 아내는 카메라쪽으로 다가와서 완전한 암흑을 만들어낸다. 마치 페이드 인의 효과 처럼. 그리고 나서, 암흑속에서 말루왕이 일어난다. 아홉번째 쇼트. 그가 문득 창문을 다시 열었을때, 이미 빛은 사라지고 없다. 거기엔 대신 가로등과 그 아래 브라운이 그를 감시하고 있다. 그 장면에서 카메라는 암흑속의 가로등 불빛아래에 있는 그를 천천히 다가간다. 이때, 기묘한 낮과 밤의 대비는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마치 첫번째쇼트와 두번째 쇼트와의 대립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듯한 이 장면은 그런 어둠과 눈부심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가 아니라, 그 경계를 그 분절을 쉽지 않게 만든다. 도대체 이 여덞번째 쇼트와 아홉번째 쇼트의 구분은 어떻게 할수있는가? 그것은 단지 쇼트의 구분이 아니라, 일종의 빛의 양면이 유효하다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하다. 이것이 나의 세번째 이유이다. 이장면의 빛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하나의 쇼트로 만들어진 서로 다른 빛인가? 아니면, 같은 태양광 하나의 빛으로 만들어진  서로 다른 쇼트인가? 아니면 두개의 쇼트이며, 두개의 빛인가?  하나로 만들어진 빛이며 동시에 하나의 쇼트인가?

네번째,이상하게 그의영화는 우리가 잘 아는 분절화는 거부당한다. 기묘하게 그의영화를 재단하려니, 문득 이 영화는 그것을 불편해 한다. 아니 그 영화는 그런것과 상관없이 어떤 즐거움을 준다. 그것은 무엇일까? 지난번에 살펴보았던 그 두번째 얼굴인 브라운 부인의 얼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말루왕의 얼굴이 벗어나버리고 마지막 장면인 브라운 부인의 얼굴이 나타날때에 우리는 그 안에서 이상한 것들을 보았다. 멈춰버린듯 보이지만 여전히 깜빡이는 눈꺼풀, 알수 없는 얼굴의 표정. 그리고 말없는 대신에 주어진 어떤 이상한 눈빛.그 눈이 카메라를 쳐다보는지 살짝 옆을 바라보는지 좀 헷갈릴 정도로 그녀의 눈은 분명히 보이지는 그 이상은 알수 없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되는 하얀 빛 그리고 곧이어 나타나는 암흑같은 화면, 그리고 엔딩크레딧. 버림 받은 것인지. 속은 것인지. 그래서 슬픈 것인지. 황당한 것인지. 모든 걸 체념한 것인지. 포기한것인지. 분노나 복수를 그려보는 중인지. 그를 그리워하는 중인지. 알 수 없는 그눈. 이 여인은 만은 잘 살고 싶은지 아니 한 것인지. 나는 진정 알 수가 없다.이 네번째 이유, 남편을 찾으러,한편 남편의 범죄혐의에 의해 경찰에 협조 해야 하는 괴로운 그녀의 눈물 혹은 실망의 눈물 혹은 좌절의 눈물. 하나의 눈물이지만 우리는 잘 알수없다. 아무리 형사 주석적 말들을 내뱉어도 우리는 쉬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이라는 비극적 상황안에서 그녀의 무얼 생각하는 걸까? 그녀의 진심은 무엇일까? 문득 그 질문이 내게 두어차례 주어졌다. 그사람의 눈을 보면, 다른 인물에게 부여된 살고 싶다. 혹은 잘 살고 싶다라는 그 어떤 기본적 생각이 쉽게 부합되지 않는다. 자꾸만 이 얼굴이 나는 진짜 얼굴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말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수 있다라거나 진실이 무언지 내가 혹은 우리가 말할수 있을때를 가르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벨라타르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어떤 진짜 얼굴이라는 의미이다.


P.S. 이 영화를, 그사람은 이 영화를 좋아할까? 그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다. 특히 그 얼굴에 대해서. 좀더 시간이 흘러서, 다시 한번 그 작품이 상영되는 날이 온다면, 같이 볼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을 기다린다.